시(詩)와 함게하는 독서여행

[스크랩] 도장을 찍다

다큰아이 1 2011. 1. 1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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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장을 찍는 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어떤 사건에 대한 긍정의 표현일 수 있고, ‘통과하다.’라는 절차적 관례일 수 있으며, 외부 강압에 의한 표현의 수단이기도하다.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받아들였을 때만이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도장의 주된 임무가 아니겠는가. 우스갯소리로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함께한 남자들은 ‘어젯밤, 도장 찍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문화가 개방된 요즘에도 이 방법이 통할런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도장은 자아의 분신과도 같으며 자신을 거는 행위이기 때문에 신중해야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해야한다. 주변에 도장을 잘못 찍어서 패가망신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보증을 선 게 잘못 되어 재산을 압류당하거나, 계약서류에 명시된 조항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행해야하고, 직장에서는 결제란에 찍은 도장 때문에 책임을 추궁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 또한 회사에서 부하직원이 올린 서류를 검토하지도 않고 습관처럼 결제를 했는데 그 서류에 문제가 생겨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 일 이후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도장을 잘 찍어야 성공한다고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신 것 같다. 다 경험에서 나온 얘기일 터이다. 살아가면서 도장을 찍어야 할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찍고 나와서도 갈등과 후회를 한 적이 또 얼마나 많은가.

 

 때문에 사람들은 상징적인 의미의 도장하나쯤을 소유하고 있다. 중학교 때로 기억된다. 당시 팠던 목(막)도장을 간직하고 있는데 손때가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어 더욱 볼품없어 보인다. 지금은 컴퓨터에 내장된 글자체로 기계가 파내지만, 당시만 해도 일일이 도장 틀에 꽂아 한자 한자 조각칼로 파냈기 때문에 글자체와 깊이가 틀릴 수밖에 없다. 세상이 편리해지고 대형화되면서 획일적인 부분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부러 귀중하게 생각했던 도장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지고 있는 막도장, 지금은 신줏단지 모시듯 도장집에 넣어 간직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인감도장은 그야말로 비싸 보이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도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나는 그때의 목도장을 인감으로 쓰고 있다.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볼 때 마다 정겹고 푸근하다. 아마 골동품을 바라보는 느낌이리라.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수제도장’을 보게 되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판다는 얘긴데, 더구나 천연자연석에 새긴다는 말에 솔깃해서 한참을 인터넷사이트에서 기웃거렸다. 1.5*1.5*6 센티미터의 예쁜 돌도장이다. 볼수록 마음에 든다. 새해도 밝았으니, 새로운 도장하나쯤 갖고 있어도 괜찮지 싶다. 올해 새 책(시집)이 나오면 지인에게 선물할 때 낙관으로 사용하면 좋겠다 싶어 구매를 결정했다.

 

 오후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대학시절 즐겨듣던 노래다. 즐겨 들었다기 보다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가슴을 뜯으며 듣던 슬픈 멜로디다. 호소력 짙은 허스키보이스의 고음이 매력적인데 가끔 라디오나 커피숍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때의 추억에 빠지곤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감정들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해서 핸드폰 벨소리로 지정해 놓은지 며칠 되지 않았다.

 

  "박순호 선생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삶이 보이는 창, 편집장 엄기수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시집원고 채택되었습니다.”

“올 2분기쯤 시집이 나올 예정이고, 조만간 계약도 해야 하니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통화를 끝내자마자 소리쳤다.

됐어!......

쿵쾅, 쿵쾅 뛰는 가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얻은 결과인가. 그동안의 행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계약이라는 단어가 길게 여운으로 남아 있다. 계약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데 마침 수제도장을 주문하고 나서 기쁜 소식을 듣게 되니, 내게 도착할 도장이 각별한 의미가 될 듯싶다.

 

 

 좋은 일로 도장을 찍게 되는 횟수가 많았으면 한다.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갑과 을이 아닌 공평한 입장에서 날인하는 세상이면 참 좋을 텐데,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진 계약서를 한부씩 나누어 갖는 게 아니라 그냥 주고받은 대화로써 순전히 믿음으로만 성사되면 좋겠지만 사람 사는 곳에 그러한 유토피아는 없지 않나 싶다. 그저 문제의 소지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 : 문화나루
글쓴이 : 문화나루 원글보기
메모 : 그대는 나의힘,나을 또다시 열심히 달리게하는 에너지원입니다. 신간 출간 축하합니다.